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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축시(丑時)의 러너 : 제6화, 관아로 가는 길

두 사람은 성곽길을 등지고 달렸다. 지금까지 늘 도망치던 방향과 정반대로."이쪽이다!"억석이 좁은 논둑길로 서연을 이끌었다. "관아까진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 놈들이 먼저 눈치채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횃불을 든 포졸이 아니라, 말을 탄 자들이었다.그중 앞장선 이의 갓끈에 매인 옥색 술이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졌다. "현감의 사람이다." 억석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저자가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발굽이 점점 가까워졌다. 서연은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산길로 접어들자 나무뿌리와 돌부리가 발목을 잡아챘고,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때마다 억석이 팔을 붙들어 세웠다.산등성이를 반쯤 넘었을 때, 앞을 가로막듯 화살이 날아와 나무 둥..

자작소설 2026.07.21

[중편] 축시(丑時)의 러너 : 제5화, 도망치지 않기로

새벽 세 시 사십일 분. 이번엔 서연이 먼저 신발 끈을 조였다.떨리는 손으로 신발을 신으면서도, 서연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도망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의 결이 달라졌다. 눈앞이 뒤틀리고, 익숙한 흙길과 안개가 서연을 맞았다. 이번엔 뒤에서 고함이 들리기 전에, 서연이 먼저 소리쳤다. "억석씨! 저 여기 있어요!"정적. 그리고 곧, 어둠 속에서 억석이 걸어 나왔다. 지난번 죽어가던 모습이 아니라 멀쩡한 모습이었다 — 마치 이 새벽이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오늘은 도망치지 않는 건가.""물어볼 게 있어서요." 서연은 숨을 고르며 그를 마주했다. "당신들을 죽인 현감, 그 사람 성씨가 뭔지 알아요?"억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왜 묻..

자작소설 2026.07.21

[중편] 축시(丑時)의 러너 : 제4화, 계향이라는 이름

손등의 핏자국은 사흘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씻어도, 문질러도 소용없었다. 마치 살갗 속에서 배어 나오는 것처럼, 지우려 할수록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서연은 더 이상 우연이라 믿을 수 없었다. 억석. 계향. 이름 두 개를 손에 쥐고, 서연은 성곽길이 있는 지역의 향토사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지역 도서관 향토자료실은 평일 낮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사서는 "계향"이라는 이름을 듣더니 잠시 표정이 굳었다. "그 이름, 어디서 들으셨어요?""…할머니 유품에서 나온 메모에 있었어요." 사서는 말없이 서고 안쪽에서 낡은 향토지 한 권을 꺼내왔다. 표지엔 곰팡이 자국이 번져 있었다. "이 동네에 오래 사신 어르신들은 다 아는 이야기예요. 입 밖에 잘 안 내려 하시지만." 책장을 넘기자 손으로 옮..

자작소설 2026.07.21

[중편] 축시(丑時)의 러너 : 제3화, 두번째 새벽

그날 이후 서연은 신발을 신지 않으려 했다. 상자 안에 넣어 옷장 깊숙이 밀어 넣고, 알람도 꺼버렸다. 그런데도 몸은 새벽 세 시 사십일 분이면 저절로 눈을 떴다. 사흘째 되던 밤, 서연은 결국 옷장을 열었다. 신발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발을 넣는 순간, 이번엔 저항할 새도 없이 눈앞이 뒤틀렸다. * 성벽은 그대로였지만 공기가 달랐다. 짙은 피 냄새,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서연은 이번엔 도망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였다. "또 왔군." 낮은 목소리. 지난번 그 사내였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그의 얼굴을 이번엔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젊고 다부진 얼굴에 마른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고..

자작소설 2026.07.18

[중편] 축시(丑時)의 러너 : 제2화, 유품 상자

무릎의 상처는 진짜였다. 소독약이 스며들 때의 따가움도, 밴드를 붙이는 손끝의 감촉도 분명 현실이었다. 하지만 신발 밑창에 말라붙은 핏자국은, 아무리 닦아내려 해도 섬유 속까지 배어들어 지워지지 않았다.서연은 그날 출근을 포기하고 본가로 향했다. 어머니는 이미 몇 년 전에 할머니의 유품 대부분을 정리했지만, 다락에는 손대지 않은 상자 하나가 남아 있었다. "네 할머니 물건은 나도 무서워서 못 만지겠더라." 어머니가 웃으며 한 말이었는데, 그때는 농담인 줄 알았다. 상자를 열자 삭은 종이 냄새가 훅 끼쳤다. 빛바랜 사진 몇 장, 손으로 꿰맨 버선, 그리고 얇은 공책 한 권. 표지에 볼펜으로 눌러쓴 글씨가 있었다. 「다시는 그 길로 가지 마라.」 날짜는 없었다. 필체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었다. 서..

자작소설 2026.07.18

[중편] 축시(丑時)의 러너 : 제1화, 낯선 길

새벽 세 시 사십일 분. 서연은 늘 이 시간에 눈을 떴다. 알람 없이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습관이란 게 그런 거였다. 마라톤을 준비한 지 팔 개월째, 새벽 러닝은 이제 숨 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현관에 벗어둔 신발을 신을 때마다 서연은 잠시 멈칫하는 버릇이 생겼다. 할머니의 유품 상자에서 나온, 낡은 미투리 한 켤레. 그 짚신의 코와 바닥 모양을 그대로 본떠 맞춤 제작한 러닝화였다. 신발 장인이 "이렇게 정교하게 삭은 짚신은 처음 본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게 기억났다. 발에 넣는 순간, 마치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꼭 맞았다. 성곽길 초입, 인적 없는 어둠 속으로 서연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퍼졌다. 축축한 새벽 공기, 안개가 낮게 깔린 옛 성벽. 늘 다니던 길인데도 오늘따라..

자작소설 2026.07.18

[중편] 걸음을 빌려드립니다 : 제10화 걸음을 빌려드립니다 (완결)

# 10화. 걸음을 빌려드립니다 (完) 헤드라이트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두 번째 차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뛰어요!" 소은이 준영의 손을 잡아끌었다.두 사람은 계단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준영이 우뚝 멈춰 섰다."준영 씨, 뭐 해요!""도망가면… 아무것도 안 끝나요." 준영이 뒤돌아 다가오는 차를 마주 봤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어쩐지 그 빛이 위협적이라기보다 지쳐 보였다. "이 차도, 결국 최덕수 어르신처럼 버텨온 거예요. 아무도 몰라주는 채로."소은은 잠시 망설이다 준영 곁에 섰다. "그럼 어떻게 해요?"준영은 천천히 두 번째 차를 향해 다가갔다. 헤드라이트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췄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한 빛이었다."들어봐." 준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작소설 2026.07.16

[중편] 걸음을 빌려드립니다 : 제9화 두번째 차

# 9화. 두 번째 차나무 문은 오래 잠겨 있었던 듯 뻑뻑하게 삐걱거리며 열렸다. 어두운 계단 아래로 퀴퀴한 공기가 훅 끼쳐 올라왔다.준영이 핸드폰 조명을 켜고 앞장섰다. 계단은 생각보다 깊었다. 열두 계단쯤 내려가자 넓은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그리고 그 한가운데, 먼지 덮인 방수포 아래 또 다른 차 한 대가 놓여 있었다."이게…" 소은이 떨리는 손으로 방수포를 걷어냈다.똑같은 모델이었다. 지금 준영이 몰고 있는 차와 색상, 연식, 심지어 사이드미러의 흠집 위치까지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차는 앞유리에 금이 가 있고 타이어 하나가 완전히 주저앉아 있다는 것이었다."쌍둥이 차…?" 준영이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시트 위에 낡은 서류 봉투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소..

자작소설 2026.07.16

[중편] 걸음을 빌려드립니다 : 제8화 넘지 못한 벽

# 8화. 넘지 못한 벽들것이 응급실 안으로 사라졌다. 최덕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 앞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준영은 조심스레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몸이 그대로 멈췄다. 마치 투명한 유리에 부딪힌 것처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저도… 안 되네요." 준영이 손을 뻗어봤지만 허공을 만지는 느낌뿐이었다.소은도 다가와 같은 벽을 확인했다.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봐요. 우리도, 아버지도."최덕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은 삼십 년 가까이 늙지 않은 듯한 젊은 모습이었지만, 두 눈만은 마치 백 년은 산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매번 여기예요." 최덕수가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마치 누군가 듣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이 순간만은, 아무리 해도 못 넘어가. 이미..

자작소설 2026.07.16

[중편] 걸음을 빌려드립니다 : 제7화 그날의 문

# 7화. 그날의 문시동 소리는 계속됐다. 준영과 소은은 서로를 쳐다보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창고 밖으로 뛰어나갔다.차는 스스로 헤드라이트를 켠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재촉하듯, 엔진음이 평소보다 낮고 무거웠다."타야 할까요?" 소은이 물었다."모르겠어요. 근데 지금 안 타면,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를 것 같아요."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는 순간, 세상이 통째로 흔들렸다.---눈을 떴을 때, 준영은 낯선 병원 복도에 서 있었다. 옛날식 리놀륨 바닥, 형광등 특유의 웅웅거리는 소리. 벽에 붙은 달력을 본 순간 숨이 멎었다.**24년 전, 5월.**"준영 씨…" 소은도 같은 걸 보고 있었다. "설마 우리, 그때로—"복도 끝, 응급실 팻말 아래 한 남자가 초조하게 서성..

자작소설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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