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소설

[중편] 축시(丑時)의 러너 : 제4화, 계향이라는 이름

도타북스 2026. 7. 2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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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의 핏자국은 사흘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씻어도, 문질러도 소용없었다.  마치 살갗 속에서 배어 나오는 것처럼, 지우려 할수록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서연은 더 이상 우연이라 믿을 수 없었다. 

억석. 계향. 이름 두 개를 손에 쥐고, 서연은 성곽길이 있는 지역의 향토사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지역 도서관 향토자료실은 평일 낮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사서는 "계향"이라는 이름을 듣더니 잠시 표정이 굳었다.

 

"그 이름, 어디서 들으셨어요?"

"…할머니 유품에서 나온 메모에 있었어요."

 

사서는 말없이 서고 안쪽에서 낡은 향토지 한 권을 꺼내왔다. 

표지엔 곰팡이 자국이 번져 있었다. 

 

"이 동네에 오래 사신 어르신들은 다 아는 이야기예요.  입 밖에 잘 안 내려 하시지만."

 

책장을 넘기자 손으로 옮겨 적은 옛 구전 설화가 나왔다.

 

조선 후기, 이 고을 현감 댁에 계향이라는 몸종이 있었다. 

용모가 빼어나 현감의 눈에 들었으나, 계향은 이미 마음을 준 사내가 있었으니 관노 억석이었다. 

 

현감은 이를 알고 노하여 억석에게 없는 죄를 씌워 죽이려 하였고, 계향은 그 부당함을 증언하려 관아로 향하던 새벽, 현감이 보낸 자들에게 쫓기다 성곽 아래에서 목숨을 잃었다. 

억석 또한 계향을 지키려다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와, 계향보다 먼저 죽어 그 죽음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엇갈려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이 새벽마다 그 길을 떠돈다 하여, 축시(丑時)에는 성곽길에 나서지 말라는 금기가 전해 내려온다.

 

서연의 숨이 가빠졌다.  억석이 매번 죽는 이유, 계향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 전부 들어맞았다.  그런데 한 가지, 결정적으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현감… 그 사람 이름이 뭐였는지 나와 있나요?"

 

사서가 다음 장을 가리켰다.  거기엔 이 지역에 대대로 뿌리내린 유력 가문의 족보 일부가 함께 실려 있었다.  서연은 그 성씨를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식는 걸 느꼈다.

 

그것은, 서연의 외가 쪽 성씨였다.

 

"저기…"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가문, 지금도 이 근처에 남아있나요?"

"그럼요. 종친회도 아직 있고, 향교 행사 때마다 나오시는 어르신들도 계세요."  사서는 별 뜻 없이 덧붙였다.

 

"그 집안이 원래 이 동네 유지였잖아요. 지금도 땅을 꽤 갖고 계신 걸로 알아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연은 할머니의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마지막 장, 끊긴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그 사람이 누구를 지키려 하는지 알 것 같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는 나를 볼 때마다 마치—"

이제 서연은 그 뒤에 이어졌을 문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죄를 대신 갚아야 할 사람을 보듯.

할머니도, 서연도 계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 현감 가문의 핏줄이었다.

 

신발은 저주가 아니라 벌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두 사람을 대신해, 가해자의 후손이 매 세대마다 그 새벽을 다시 겪도록 만든 벌.

 

그리고 서연은 문득 깨달았다 — 그렇다면 이 저주를 끝내는 방법은,

도망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무언가여야 한다는 것을.  매번 도망치고 매번 억석이 죽는 걸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그날 밤, 서연은 처음으로 자진해서 신발을 신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됩니다.

[중편] 축시(丑時)의 러너 : 제5화, 도망치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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