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소설

[단편] 균열 : 제4부(완결). 우리가 먼저 친다

도타북스 2026. 6. 14.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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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명함

 

재훈이 속삭였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나는 명함을 천천히 뒤집었다. 앞면엔 이름과 직함이 적혀 있었다.

뒷면엔 아무것도 없었다. 깨끗한 흰 종이. 하지만 빛에 비추면 — 희미하게 눌린 자국이 보였다.

볼펜으로 눌러 쓴 흔적. 다른 종이에 쓴 게 배어든 것이었다.

숫자 여섯 자리.

 

"이게 뭔지 알아?" 나는 재훈에게 명함을 건넸다.

재훈이 빛에 비췄다. 눈을 가늘게 떴다.

"계좌번호 앞자리 같은데."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금고 비밀번호야.

저 사람, 나한테 증거 팔라는 거야. 협박이 아니라 거래. 뭔가 감추고 싶은 게 따로 있다는 뜻이지."

재훈이 명함을 내려다봤다.

"이름 봐. 직함."

재훈의 눈이 커졌다.

 

도시개발공사 사업본부장. 강태민.

"구청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위에 공사가 있어. 이 아파트 부지 — 공사에서 매입했어. 부실시공 알면서 사업 승인 해준 거야. 이 사람이 그 결재 라인 꼭대기야."

재훈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 우리가 가진 USB — 이 사람한테도 치명적이겠네."

"그래서 직접 온 거야. 경찰 시켜서 처리하려다 안 되니까."

나는 링거 바늘을 바라봤다. 손등이 욱신거렸다.

"오늘 밤 안에 움직여야 해."


17. 반격

 

재훈이 노트북을 가져왔다. 병실 커튼을 치고, 소리를 낮췄다.

나는 침대에 기댄 채 화면을 봤다. 클라우드에 올라간 스캔 파일들.

구조 계산서, 내부 검토의견서, 날짜와 이니셜이 찍힌 승인 문서들. 재훈이 찍은 현장 사진들. 차 번호판, 형사의 얼굴.

"언론 쪽에 아는 사람 있어?" 내가 물었다.

"한 명 있어. 같은 과 후배. 지금 탐사보도팀이야."

 

"연락해."

"지금 당장?"

"강태민이 우리한테 시간 준 건 생각할 틈을 주려는 게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는 거야. 움직임 감시하고 있을 거라고. 빠를수록 좋아."

재훈이 폰을 들었다. 잠깐 망설이다 번호를 눌렀다.

나는 그사이 강태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검토해봤습니다. 만나겠습니다. 내일 오전 열 시. 장소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시간을 버는 거였다.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재훈이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온대. 지금 바로."


18. 밤새

 

후배 기자 이름은 윤서진이었다. 새벽 한 시에 병실에 나타났다.

작은 가방에 노트북을 들고 왔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짧게 인사했다.

"파일 보여주세요."

감정이 없었다. 좋았다. 나는 USB를 건넸다.

서진이 파일을 열었다. 화면을 스크롤했다. 멈췄다.

다시 스크롤했다. 한참 읽었다. 재훈이 찍은 현장 사진들을 봤다.

 

형사 얼굴 사진을 봤다. 강태민 명함을 봤다.

노트북을 닫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내일 낮 방송 가능해요. 온라인 먼저 내보내고 저녁 메인 뉴스 연결할게요."

"보호는요?" 재훈이 물었다.

"저희 법무팀이 움직입니다. 오늘 밤부터요. 두 분 신변은 저희가 책임질게요."

나는 창밖을 봤다. 병원 주차장. 가로등. 새벽의 도시. 어딘가에 강태민이 있을 것이었다.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보낸 문자에 답이 왔다.

 

「알겠습니다.」

한 글자도 흔들리지 않은 답장이었다. 익숙한 사람의 문자였다. 이런 일에.

나는 폰을 내려놓았다.

괜찮아. 내일 아침이면 달라진다.


19. 폭로

 

오전 열한 시 사십 분.

병실 TV에서 속보 자막이 흘렀다.

「신축 아파트 붕괴 — 내부 문건 단독 입수, 부실시공 조직적 은폐 정황」

앵커 목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화면에 문서가 떴다.

내가 코인 로커에서 꺼냈던 바로 그 서류들이었다. 구조 계산서. 승인 도장. 날짜. 이름들.

재훈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아내가 내 손을 잡았다. 새벽에 깨어 병실로 들어왔을 때,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옆에 앉았다. 그게 전부였다.

속보가 이어졌다. 도시개발공사 사업본부장 강태민 긴급 소환.

담당 형사 박승호 직위해제 및 수사 착수. 구청 건축과장 출국금지.

하나씩. 하나씩 무너졌다.

나는 TV를 껐다.

창밖에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20. 그 후

 

민철은 재활을 시작했다. 두 다리 모두. 느리지만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지수는 먼저 퇴원했다. 왼팔 감각이 돌아오는 중이라고, 문자로 알려왔다. 짧은 문자였다.

끝에 마침표가 있었다. 지수다웠다.

 

재훈은 서진 기자와 후속 취재를 이어갔다.

강태민 위에 또 다른 결재 라인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고 했다.

재훈은 그게 끝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소영은 그날 이후 연락이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그녀 나름의 방식인지도 몰랐다.

나는 퇴원하던 날 아내의 가게에 들렀다. 평일 오후였다. 손님이 두 명 있었다.

아내가 떡볶이를 담아주고 있었다. 딸아이가 카운터 옆 작은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안았다. 한참 안고 있었다.

 

아내가 옆에 와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어깨가 닿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날 밤, 혼자 베란다에 나가 앉았다.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어딘가에 새로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가 있을 것이었다.

어딘가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벽이 있을 것이었다. 누군가 그 위를 걸어 다니고 있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이제는.

베란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주 가는 선이 하나 있었다.

균열이었다.

나는 오래, 그것을 바라봤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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